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미 전쟁 (문단 편집) === 에드워드 4세의 축출과 복위 === 에드워드 4세는 구 랭커스터파 정적들에게 관대한 편이었기에 치세 초기는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의 가장 큰 지지자인 워릭 백작 몰래 상대적으로 격이 떨어지는 우드빌 집안의 과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고, 우드빌 가문 사람들을 중용하기 시작하면서 네빌 가문과의 관계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동생 [[조지 플랜태저넷|클래런스 공작 조지]]를 끌어들여 에드워드 4세를 납치했지만 국왕이 없는 상태의 국정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에드워드 4세를 풀어주었다. 에드워드 4세는 관대하게 두 사람을 용서했지만 이들이 다시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사주했음이 밝혀지자 이들을 반역자로 선포했고, 두 사람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부르고뉴국|부르고뉴 공국]]과 결혼 동맹을 맺은 에드워드 4세를 견제하고자 했고, 자신의 궁정에 있던 랭커스터파의 영수 마가렛 왕비가 구적인 워릭 백작과 화해하도록 했다. 에드워드 4세가 워릭 백작이 사주한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1470년 가을, 워릭이 이끄는 랭커스터파 군대가 런던을 점령하여, 헨리 6세가 복위되었고, 워릭의 동생 몬태규 후작 존 네빌이 에드워드 4세에게 등을 돌려 에드워드 4세는 막내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훗날의 [[리처드 3세]])와 함께 [[부르고뉴국]]으로 망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처음에는 에드워드 4세를 지원하는 데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으나, 프랑스 왕 루이 11세가 잉글랜드를 끌어들여 부르고뉴 침공을 계획하자 에드워드 4세에게 병력을 지원했다. 에드워드 4세의 상륙 이후 랭커스터 정권에서 입지가 좁아진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에드워드 4세에게 합류하는 등 요크 지지파가 에드워드에게 집결하자, 에드워드 4세는 런던을 탈환하고 다시 헨리 6세를 확보한 이후 '''바넷 전투'''에서 네빌 형제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전사시키며 승리했다. 전투 승리 직후 헨리 6세는 [[런던탑]]에서 의문사했으며, 에드워드 4세의 왕위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위협받지 않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